신냉전 서막?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같은 불명예스런 독재자 명단에 올렸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푸틴 개인에 대한 제재는 실질적 효과는 별로 없지만 미국이 외교관계를 단절하거나 국제적 왕따가 된 국가의 지도자만을 타겟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상징성이 있다. 미국은 또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러시아군의 즉각적이며 완전한 무조건적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추진했으나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거부로 무산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푸틴에게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에 4억5000만 유로의 군사 원조에 합의했다. EU 역사상 전쟁 중인 국가에 무기를 공급하는 것은 처음이다.
SWIFT 무기화
서방세계가 러시아의 경제와 금융시스템을 보다 확실히 고립시키기 위해 가장 강력한 경제 제재수단 중 하나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이라는 ‘금융 핵 옵션’을 선택했다. 미국과 유럽집행위원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는 현지시간 토요일 공동 성명을 통해 일부 러시아 은행들을 SWIFT 메시징 시스템에서 배제시키고, 러시아 중앙은행이 제재조치를 무마하기 위해 약 64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풀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유가 안정을 위해 에너지 분야와 관련된 금융거래는 예외로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 정부 관료가 전했다. 크레디트스위스의 Zoltan Pozsar는 SWIFT 퇴출로 글로벌 은행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통화당국이 시장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유럽연합은 러시아 중앙은행과의 모든 거래를 금지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가 신용등급 강등
S&P가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조치를 이유로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로 낮추고, 추가 강등을 경고했다. 우크라이나의 신용등급 역시 B에서 B-로 하향 조정했다. 피치는 우크라이나의 신용등급을 B에서 CCC로 강등했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외 신뢰 및 공공 재정, 거시금융 및 정치 안정을 위협하는 리스크가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무디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신용등급 하향조정 검토에 들어갔다. 현재 무디스의 러시아 신용등급은 정크보다 한 단계 높은 Baa3이며, 우크라이나는 투자 등급보다 6단계 낮은 B3다. 무디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게 고조되었고 서방세계의 러시아 제재 조치로 국채 상환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재무부는 국제신용평가사의 조치에 대해 높은 외환보유고와 낮은 부채 수준을 지적하며 펀더멘털이 안정적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블랙록과 뱅가드그룹 등 일부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러시아 금융 제재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 재무부는 이들에게 5월 25일까지 블랙리스트에 오른 VTB 등 5개 러시아 금융기관의 주식과 채권을 비미국계에게 모두 처분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VTB와의 비즈니스 관계도 끊어내야 한다.
러시아서 발빼는 기업들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이 영국 정부의 압박에 못이겨 30년간 이어온 러시아 국영 석유·가스회사인 로스네프트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모든 가능한 채널을 통해 푸틴을 막겠다는 서방세계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결정으로, BP는 약 20%에 달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최대 250억 달러의 충격이 예상된다. 한편 소시에테제네랄과 크레디트스위스는 금속과 원유 등 러시아산 원자재 상품의 트레이딩에 대해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고 소식통이 전했다. 향후 제재조치가 에너지까지 확대되거나 러시아의 SWIFT 전면 퇴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편 EU는 러시아가 소유, 등록한 모든 항공기의 운항을 금지할 방침이다. 또한 러시아내 부호와 공기업 및 언론사의 고위 임원 등에 대한 제재조치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는 1.3조 달러 규모의 자국 국부펀드가 보유한 러시아 자산을 처분할 계획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월요일 그리니치 표준시(GMT) 4시부터 러시아 증권을 매도하려는 외국계 고객의 주문을 거부하도록 시장 참가자들에게 지시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ECB 시장 안정 약속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물가와 금융 안정을 위해 무엇이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며 시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현지시간 금요일 라가르드는 기자들에게 “ECB는 전개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 하고 있다”며, 정책 유연성을 유지하고 선택지를 열어둬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책당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로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파악하느라 애쓰는 모습이다. 이번 분쟁으로 에너지 가격 급등해 이미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을 더 끌어올리는 동시에 이제 막 팬데믹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유럽에 성장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ECB 추정에 따르면 러시아 침공은 올해 유로존 경제성장률에 0.3%-0.4%p 가량 충격이 예상된다. 3월 9일-10일 정책위원회를 앞두고 보다 자세한 분석이 마련 중이다. 당초 이번 회의는 ECB의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얼마나 빨리 거둬들일지에 대한 논의가 주된 관심사였다. 금융시장은 여전히 ECB의 출구전략이 궤도를 따를 것이란 기대에 베팅 중이다. 트레이더들은 10월까지 25bp 금리 인상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